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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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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용화동교회 김세진 목사가 당도한 부산은 피난의 중심지로 당시 인구의 10배가 넘는 200만 피난민으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인과 교역자 또한 넘쳐나자 미 북장로회 선교부는 해군에 요청하여 교역자들을 가덕도와 거제도 그리고 제주도에 분산 수용하게 됩니다. 한편으로 피난민 교인들과 교역자는 부산에 평양교회를 개척하여 급격한 부흥을 이루었으며 부산에서 시작된 북한교회의 재건은 남한 전국에 북한교회를 재건하는 운동으로 확산됩니다. 이 일에 매진했던 조직이 이북신도대표회로 전국에 지부를 조직하여 북한교회 재흥에 나섰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교회재흥은 이후 한국교회 부흥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남한에 북한 교회를 재건한 이후 당면 과제는 노회를 재건하는 문제였습니다. 지역을 기반으로 한 노회는 지역 없이 재건할 수 없고, 그렇다고 곧 고향으로 돌아갈 꿈을 꾸는 상황에서 이남의 노회에 가입할 수도 없게 되자 총회는 비상조치법을 통해 이북 12개중 10개 노회의 총대자격을 인정합니다. 물론 이는 남북한 통일까지의 한시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이로써 광복 후 처음으로 남북한 통일 총회를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제주지역 교회는 피난민에게 따로 예배드릴 수 있도록 시간을 조정하는 등 배려하였고 피난민 자녀들을 교육시키는 일에도 힘썼습니다. 이후 피난민들은 제주지역에서 북한 교회를 재건하여 장로교 16개, 감리교6개를 세우는 귀한 신앙의 유산을 남겼습니다.
강원지역에서는 1909년 이후 전통적으로 감리교와 장로교 사이에 교계예양 즉 선교지분할협정이 지켜져 왔으나 1936년 이후 깨어진 상태에서 장로교와 감리교가 중첩 선교지로 삼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월남 피난민들이 강원도에 정착하게 되자 기존 감리교회가 장로교회로 바뀌는 경우도 있었고 장로교 개척 교회가 늘게 되었습니다. |